top of page

그 곳, 그리고 지금 여기

그 곳, 그리고 지금 여기

 

그 곳, 삶의 시간과 장소.

늘 그렇듯 삶의 시간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다 담는다. 한 순간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서서히 변해가는 모든 것들과, 언제나 늘 그대로인 모든 것들도 다 차곡차곡 시간 안에 쌓여간다. 가득 담기고 쌓여진 시간과 공간의 기억은 삶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을 주고, 끝없이 변화해가는 사회 속에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상기시켜 준다.

<그 곳, 그리고 지금 여기>展은 ‘광주’라는 ‘곳’을 이야기한다. 변화된 모습과 사라진 풍경, 그리고 기억에만 존재하는 모습,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 풍경들, 그리고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르는 곳들까지. ‘그 곳’들은 작가들 마음 안의 특별한 장소들이자, 여기 광주라는 곳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가로지르는 ‘곳’이 아닐까.

 

변화해가는 도시, 삶의 기억이 붙잡은 풍경.

1990년대 광주에 생겨난 계획도시들은 ‘광주’라는 풍경을 바꿔놓았다. 도심 외곽에 새로이 아파트단지들이 생겨나고, 차츰 사람들은 원도심에서 빠져나가 ‘ㅇㅇ지구’라 명명된 장소들로 옮겨갔다. 편리함의 추구는 사람들의 주거방식도, 행동양식도, 이를 둘러싼 모든 공간의 외면도 달라지게 했다.

삶의 편리를 좆아 거주지를 옮겨갔지만, 떠나지 않았던(혹은 떠날 수 없었던) 이들도 있다. 평생을 살아온 ‘곳’을 떠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주’는 삶의 외형뿐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가 바뀌는 것, 여전히 머물러 있던 사람들은 그리 달라질 것 없는 풍경 안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 특별할 것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특별해진 풍경들. 변화의 이면에 물러나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키던 것들엔 삶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졌다. 언젠가는 자본의 논리와 인간의 욕망에 밀려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 위협이 뒤따르지만, 그 너머 삶의 기억이 붙잡은 풍경들은 ‘지금 여기’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전시 참여작가 6인은 근 삼십여 년 변화의 시간동안 성장하며 대학시절을 보낸 30~40대 초반의 성인들이다. 이들은 변화된 도시의 지난 기억들을 들춰내간다. ‘사라져가는 장소’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삶의 기억’들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다시 보는 ‘광주의 장면’들

그리 특별하지 않은 장소들이다. 원도심에서 구도심이 되어버린 동구의 계림동, 옛스러움을 던져버리려는 아우성인지, 연일 이어지는 공사현장들. 철거되어가는 집들. 무참하게 쓸데없어진 물건처럼 들어 올려 버려지는 집. 어린 시절 어디선가 보았음직한 낡은 대문, 소박하게 내걸린 피아노교습소 간판. 하릴 것 없이 그저 너무도 평범한 삶의 풍경들이다. 허나 이 풍경들은 곧 사라지거나, 또는 사라지고 없는, 또 무참히 철거되어가는(사라짐 당하는) 장면들이다. 그대로 남아 있기를 허락하지 않은 사회는 수많은 것들을 삼켰다.

 

강선호 작가는 광주의 재개발 풍경들에 시선을 뒀다. ‘마치 생물의 생로병사를 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하는 풍경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한 가족의 삶을 담았던 집, 한 마을의 삶을 고스란히 간직했던 장소들은 한꺼번에 무참히 사라진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모두 사라지고 나면 그 곳엔 다시 거대한 아파트가 들어선다. 계림동, 광천동, 신안동, 그동안 광주 도심의 계획도시가 아니었던 곳에 최근 집중되어 보이는 풍경들이다. 작가는 무참히 사라지는 그 곳들을 보며 인간의 욕망이 뒤엉켜 낸 지금 현재 여기를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노여운의 그림들은 자신의 기억에서 출발했다. 어린 시절 몇 년간 살았던 학동의 어느 동네. 10년이 지난 후 우연히 발길이 머문 곳엔 덩그러니 공터만이 남아 있었다. 재개발로 철거되어가는 집들을 보며 어린 시절의 그리움은 그림으로 담겨져 갔다. 차들도 지나지 않은 좁고 작은 골목길, 사람들의 무수한 발걸음이 쌓여가던 길, 그 길이 만나는 곳에 항상 있던 작은 슈퍼. 오래되어 빛바랜 파란색 나무대문도. 자꾸만 바뀌어가고 사라지는 것들 사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기억의 풍경들은 마음 속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박성완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풍경을 그려나간다. 금남로의 분수대도, 무등산 한귀퉁이 자라난 마른 풀도, 대학 교정의 잔디밭도, 수년 째 한 자리를 지켜온 호떡집도.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소소한 공간들이다. 광주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 광주를 떠나지 않았던 그가 바라본 광주의 풍경들은 소소하기 그지없지만, 그림 안에서만은 특별함이 가득하다. 지극히 일상적인 장소라 하기에 무색하게 그림 안에는 다채로운 색과 환한 빛은 작가만의 특별함을 가득 장전해준다. 무심히 지나치면 보지 못하는 것들. 그 아름다움을 보란 듯 화면을 가득 채운 활기찬 붓질은 그 곳의 풍경에 생기를 불어넣고 다채로운 기억들을 환기시켜준다.

박인선은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이 파괴됨을 목격하면서 이를 작품에 담아갔다. 광주의 까치고개에 자리했던 작은 한옥집인 외갓집. 외갓집이라는 그 안온함을 한껏 머금은 집은 재개발 붐에 이끌려 사라졌다. 작은 다락방에서의 기억도, 늘 넓은 품이던 할머니의 기억도 마치 송두리째 사라지는 듯한 안타까움에 이를 작품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위태롭게 화면 한가운데 매달린 집은 그녀 자신의 사라져가는 기억이자, 자본주의 논리로 사라지고 포장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내면이 아닐까. 송두리째 뿌리까지 뽑힌 집의 허망한 모습에 지금 여기, 우리 사회의 풍경이 그대로 투영된다.

안희정은 대학에 진학하며 광주로 왔다. 그녀에게 광주는 처음 접한 물질문명의 장소였다. 조금은 위압적이었던 도심의 한 가운데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풍경들을 찾아다녔다. 모두 똑같은 형태의 사각 큐브들로 이뤄진 아파트 보다는 각기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은 동네의 작은 집들, 창문들, 사람의 발길과 숨결이 베인 골목길의 담벼락 등은 차곡차곡 사진이 되었다. 새로운 것 보다는 오래된 것들에 베인 인간의 손길과 고마운 마음만은 그대로이길 바라며 지금 ‘여기’ 남아있길 바라는 것들을 사진으로 기록해간다.

글을 쓰는 타라재이의 고향은 서울이다. 광주에 살게 된지 7년 째, 그녀가 본 광주는 어린 시절 기억과 교차된 풍경들로 다가왔다. ‘기억보관소’라는 다소 특별하고도 생소한 업(業)을 가진 그녀는 사람들의 기억을 수집하고 기록하고 보관해준다. 5인 작가가 바라본 광주라는 ‘곳’과 지금 ‘여기’를 담은 작품들은 다시 타라재이의 ‘기록’이 되었다. 타인의 기억을 수집하듯, 작가들의 기억이 베인 공간들을 거닐며 그들의 기억을 공유하고, 작품을 곱씹어가며 적어간 문장들은 작품 사이를 가로지르며 다시 지금 여기의 생각들을 들춰낸다.

 

지금 여기, 우리 삶의 현재를 생각한다.

삼십여 년의 시간동안 몰라보게 달라진 ‘광주라는 곳’, 누군가는 일기를 쓰듯 매일매일 그려가고, 누군가는 기억 속 시간과 장소를 끌어내고, 또 누군가는 사라져가는 곳들을 안타까워하며 붙들어놓았다. 현실에서는 사라졌지만 작품에는 그대로 담겨진 ‘곳’들. 장소도, 사람의 온기도 사라졌지만, 그 곳에서의 시간을 살았던 이들의 기억은 온전히 변함이 없다.

전시를 기획하며 이 곳을 다시 생각했다. ‘광주’라는 곳은 어떤 곳일까. 새롭게 변화하기를 열광하기도, 파괴되고 사라짐에 안타까워하기도 하지만 늘 그렇듯 일상은 크게 요동치지 않는다. 덤덤히 담아낸 작품에 담긴 빛처럼 화려하지도 현란하지도 않지만, 사람들의 온기가 가득한 곳. 본래의 모습은 그런 곳이 아닐까. 전시를 보며 외면은 끝없이 변화해갈지라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본연의 모습과, 우리 삶의 ‘지금 여기’를 다시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전시를 위해 기꺼이 작품을 출품해주신 강선호, 노여운, 박성완, 박인선, 안희정, 타라재이 작가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19. 3. 예술공간 집. 문희영

강선호, 노여운, 박성완, 박인선, 안희정, 타라재이
2019. 3. 26 ~ 4. 22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