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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재발견

김제민, 이호​동
2018.8.1. ~ 8.30

존재의 재발견

 

보도블록 위를 걷는 발끝에서, 문득 고개를 돌린 아파트 담벼락에서, 울퉁불퉁 다듬어지지 않고 발길 닿지 않는 여느 길에서도 풀들은 자라나고 있다. 고개만 돌리면 어느 곳 할 것 없이 어디든 존재하는 녹색의 풀들. 도심 속 녹색풍경은 점점 사라지지만, 시선의 저 아래 발끝 어딘가 초라한 녹색은 드문드문 끝없이 펼쳐진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길에서 벗어나 쓰임새를 다한 수많은 사물들. 쓸모는 있으되 흥미가 떨어져버린 다양한 물건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토해낸 사물들은 삶의 바깥으로 밀려나 무심한 존재가 되어간다.

무심한 ‘풀’들과 무심한 ‘사물’들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풀이고 쓸모없는 사물들일까.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경이로울 만큼 질긴 생명력을 지닌 잡초보다 더 위대하고 누군가의 손길에서 온 마음을 받았을 어떤 물건만큼 진귀한 순간이 있었을까. 과연 우리는 그런 삶의 순간이 있었는지, 또 그러하게 될는지, 저 하찮은 풀과 사물들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자신들이 무심한 존재인지, 인간들이 무심한 존재인지 말이다.

이번 전시는 김제민, 이호동 두 작가가 바라본 우리네 삶의 풍경이랄 수 있다. 두 작가는 삶의 중심이 아닌 주변과 바깥의 풍경을 본다. 이름 모를 잡초와 버려진 사물들, 이들의 존재를 새롭게 바라보며 그려내고 또 만들어낸다.

 

 

그려짐으로 재발견된 존재, 풀.

김제민 작가는 ‘풀’을 그린다. 그려진 풀들은 무심히 존재하는 풀이 아닌 특별한 ‘풀’로 변모한다. 마치 인간들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 체력단련을 하고, 스포츠 경기를 한다. 또 이들의 호신술교본도 등장한다. 이런 생경한 장면들은 유희적 코드를 내재하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흥미를 끌어당긴다. 헌데, 유쾌하지만 결코 유쾌하지 않고,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림을 처음 마주했던 유쾌한 감정은 이내 약간의 무게도 장착케 한다. 그저 잡초인 흔하디흔한 풀이지만 작가가 그려내는 장면들에선 우리들의 모습이 교차된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 대입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공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가녀린 풀들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작가 특유의 재치가 빛나는 그림의 매력 덕분인지 너무 무겁지 않게 즐겁게 작품과 마주한다. 우리들의 삶이 다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고 닥친 일들을 가볍고 즐겁게 헤쳐 나가라고 다독여주는 듯하다. 한편 화면 가득 빽빽하게 그려진 식물들의 모습은 ‘그리기’라는 방식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풀을 의인화하여 그려낸 작품들과 달리 그저 무수히 많은 흑백자국들이 화면 전체를 장악한다. 바로 ‘그리기’라는 방식이 전면에 내세워진 것이다. 작가의 직관으로 바라본 식물의 모습, 생각이 배제된 화면은 보는 이들을 작가가 실제 그림을 그리는 순간으로 안내한다. 슥슥 화면 위를 지나가는 드로잉 자국의 소리와 손의 움직임이 연상되며 초록 풍경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듯하다. 그렇게 ‘그려짐’을 거치며 ‘풀’들은 한갓 풀이 아닌 특별한 ‘풀’로 재발견 되어간다.

 

 

만들어짐으로 재발견된 존재, 사물.

이호동 작가는 세상 모든 사물들을 다시 바라본다. 한때는 누군가의 사랑을 한껏 독차지했겠지만 손길에서 멀어지고 쓸모를 다한 사물들을 새롭게 보며, 스스로를 내려놓는 겸손한 마음으로 사물과 다시 마주한다. 어떤 물질이 재료가 되고 물건으로 만들어지며 목적에 의해 사용되었을 때에는 그저 한갓 물건에 지나지 않았을 테지만, 쓰임이 사라진 물건들은 다시 하나의 오브제로, 재료로 작가의 눈에 비춰진다. 작은 플라스틱 물병, 손잡이가 사라진 테니스채 등 그야말로 목적이 사라진 물건들은 모두 작품의 재료가 된다. 작가는 그렇게 세상 모든 사물들을 오브제로 간주하며 놀이처럼 작업을 이어간다. ‘하루살이’, ‘눈사람’, ‘이산가족’ 등 쓸모없던 사물들은 작가에 의해 새 이름을 부여받고 새로운 존재가 되어간다. 본래 물건의 목적은 사라졌지만, 물건의 모양은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냈고 작품이라는 존재로 다시 세상과 만난다. 작가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놀다’라고 명명한다. 버려진 사물들에서 우리 삶의 모습을 보았고, 만날 수 없는 물건들을 조합해나가며 경직된 일상을 유연하고도 즐겁게 전환시켜간다. 버려졌지만 버려질 수 없는 물건들에서 스스로를, 또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오브제로 놀며 다시 만들어진 사물들은 또 다른 존재, ‘작품’으로 재발견되어간다.

 

 

세상 모든 존재들을 다시 바라보기

김제민 작가가 바라본 잡초와 이호동 작가가 바라본 사물들. 두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 보게 되는 풍경에는 자연스레 우리네 삶의 모습이 투영된다. 세상 가장 하찮은 것 같은 잡초와 쓸모없이 버려진 사물들이지만 두 작가는 모든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시선의 밖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삶의 안에 있는 모습이라고 다시 한 번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예술이란 특별한 시선을 담은 풀과 사물들은 다시금 작품이라는 존재로 재발견된다. 어쩌면 끝없이 순환되는 우리 삶의 모습을 아주 많이 닮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심하지만 무심하지 않고, 버려졌지만 버려질 수 없었던 것들을 그려내고 만들어낸 두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며, 삶을 둘러싼 작은 것 하나까지도 한 번 더 바라볼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전시를 위해 무더운 여름 작품 안에서 수고로움을 더했을 김제민 작가님과 이호동 작가님에게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18. 8 예술공간집. 문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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