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공간 집 기획 _ ‘광주의 추억’
#1_<축적된 시간, 남겨진 풍경> 정선휘展. 2018.10.1.~10.9
#2_<The Scene, 사라지고도 남겨진> 박일구展. 2018.10.10.~10.18
1부 - <축적된 시간, 남겨진 풍경> 정선휘 展
지난 시간의 풍경들을 들춰내다
불과 20년의 시간이다. 그 시간을 지나온 그림들을 다시 세상 밖으로 들춰내었다. 비록 20년의 시간이지만 삶의 풍경은 참 많이도 바뀌었다. 바뀐 게 풍경뿐일까, 삶의 외형도 내형도 회오리치듯 바뀌어갔다. 더불어 그림의 풍경도, 그림을 그리는 풍경도 모두 바뀌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것은 그림 속 풍경과 그 시절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마음만은 아닐까.
‘광주’라는 기억과 추억
이번 전시는 ‘예술공간 집’이 가진 장소적 특수성에서 출발한다. 광주의 동구 장동, 전남여고 인근에 자리한 51년이 된 한옥집인 ‘예술공간 집’은 광주라는 기억과 추억의 한 켠에 위치한다. 광주의 원도심으로 한때 중심가였던 충장로와 금남로, 그리고 인접한 전남여고와 대인시장, 동명동, 장동, 산수동, 학동, 계림동, 지산동 등지에는 광주의 역사가 오롯이 존재한다. 도심 재개발 등으로 번화가가 분산 확장되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옮겨나가고 서서히 풍경도 바뀌어갔다. 최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서고 새로이 번화가로 자리매김해가는 동명동거리로 외형은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골목골목 구석진 곳들에는 옛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1990년대 후반 정선휘 작가는 장동과 동명동에 작업실과 집이 위치했기에 무수히 많은 발걸음으로 광주를 탐독했다. 그렇게 탐독된 정경들은 ‘광주’라는 너무 현대화되지 않았던, 소박하고도 소소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심의 풍경들로 남겨졌다.
축적된 시간, 남겨진 풍경
포장되지 않은 자갈길 위를 걸어가는 두 아이를 품고 따스함이 화면 가득 내려앉았다. 하굣길의 두 아이는 무슨 이야길 주고받는지 발걸음은 느릿느릿하기만 하다. 경전철이 없어지고 폐선부지 위 녹슨 철로와 강렬하게 대비되는 분홍빛 나팔꽃, 푸르스름한 새벽녘 도심을 가로지른 마지막 열차,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 그저 특별할 것 없는 삶의 풍경들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마주한 풍경엔 뭔가 모를 애틋한 특별함이 베어나지만, 당시 정선휘 작가에게는 그저 그렇게 자신의 삶을 둘러싼 일상의 풍경들이었다. 늘상 걸어 다니게 되던 곳들, 집과 작업실의 주변에서 반복적으로 보게 되는 풍경들, 이를 바라보는 정선휘 작가의 마음이 꽉 차올라 두툼해질 즈음이면 풍경들은 그림 안으로 옮겨졌다. 푸르스름하지만 따스하고, 스산하고도 휑하지만 꽉 찬 온기가 전해온다. 바로 삶의 온기 덕분인지 그림의 푸른 색조는 차갑지 않고 따스한 기운으로 스며든다. 다시 20년의 시간을 생각한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의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을지언정, 풍경들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변해버렸다. 그래서인지 지난 시간의 그림이 품은 삶의 흔적들은 더욱 아스라하기만 하다.
다시, 그림으로 만나는 삶의 풍경
그림은 시간을 차곡차곡 축적했다. 도심의 풍경은 쏜살같이 변화해갈지언정 그림은 그대로 시간을 축적하고 있다. 어찌 보면 사람의 마음과 손길이 빚어 낸 그림이기에 더 많은 감정들을 품고 있으리라. 다시 들춰낸 그림들엔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풍경들이 존재한다. 느릿한 풍경들, 삶의 온기가 베인 장면들, 더불어 작가의 손이 슥슥 지나간 붓자국의 흔적들 사이로 여유로운 공기가 맴돈다. ‘볼 수 있고, 아는 만큼’그린다는 작가의 말처럼, 수많은 시간 몸과 마음의 눈이 같이 체득한 풍경들은 진솔하게 화면 위로 내려앉았다. 삶의 풍경은 그림이 되었고, 그림은 다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20여 년이 지나 다시 들춰낸 그림들을 보며 빠르게 빠르게만 변해가는 삶의 건너편에서 조금은 느릿하고도 한가롭게 시간을 거닐며, 그림 안에 담긴 삶의 풍경이 건네는 이야기를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란다. 전시를 위해 지난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그림들을 펼쳐주신 정선휘 작가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8.10. 예술공간 집 문희영
2부 - <The Scene, 사라지고도 남겨진> 박일구 展
지나간 시간의 흔적
도심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던 경적소리, 기찻길 건널목의 종소리, 아스라하고도 선명한 기억으로 많은 이들에게 남아 있지만, 도심을 가로지르던 철도는 사라졌다. 멈춤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도 많은 것들을 사라지게 했지만, 인간의 기억은 미처 사라지게 하지 못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사진은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안온하게 모든 것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기찻길 너머의 기억들
이번 전시는 ‘예술공간 집’이 가진 장소적, 공간적 특수성에서 출발한다. 광주의 동구 장동, 전남여고 인근에 자리한 51년이 된 한옥집인 ‘예술공간 집’은 너무 현대화되지 않은 소박한 도시였던 ‘광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인근인 계림동과 산수동, 농장다리, 그리고 남광주 역사에서 효천역까지 이어졌던 기찻길은 ‘광주’라는 기억과 추억의 한 가운데를 차지한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이어진 간선철도였던 경전선은 광주의 도심 한복판을 오가던 철도였다. 1995년 철도 이설을 앞두고 마지막 기적소리가 울리기까지 도심의 낮과 밤을 가로질렀다. 박일구 작가의 손에 카메라가 들리기 시작하던 1990년대 초, 도심의 한가운데 끝없이 뻗어있던 기찻길은 특별한 풍경이었다. 유년시절 작가에게 기차는 세상의 넓이를 확장시켜주던 또 하나의 눈이었고, 훌쩍 자란 청년의 눈으로 바라본 기찻길은 다시 ‘사진’이란 세상과 연결해주는 특별한 그 무언가였다. 동명동에 위치했던 작업실 덕분에 기찻길은 작가의 삶의 테두리 안에 있었고, 기찻길 옆으로 계림동, 산수동, 동명동의 구석구석 삶의 냄새가 짙게 베인 골목길은 흑백필름 안으로 하나하나 내려앉았다.
사라지고도 사라지지 않은, 남겨진 장면들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은 많은 장면들이 있다. 낮은 담벼락을 따라 이어진 유난히도 구불구불한 골목길, 여러 갈래의 길이 시작되고도 끝나는 곳에 어김없이 보이던 작은 구멍가게. 통조림캔과 라면, 과자, 종이로 말아놓은 두툼한 국수뭉치, 가게입구에 걸린 담배와 우표 표지판. 만물상 같은 구멍가게들은 골목의 하루를 시작하고 끝을 맺는 곳이었다. 기찻길 건널목에 선명하게 X자 푯말 위에 새겨진 ‘멈춤’, ‘전파사’, ‘양장점’, ‘00사장’이라 불리던 사진관. 대합실 긴 의자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채 30년도 되지 않았건만 꽤 오래 전처럼 저 멀리 사라져버린 장면들이다. 흑백사진 속 장면들은 사라졌지만, 장면에 담긴 아스라한 추억과 따스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 한 귀퉁이 깊은 곳에 그대로 있다.
열정의 시선이 보듬은 삶의 안온한 순간
까만 암실 속 공기가 둔탁해질 때면 무작정 카메라 들쳐 메고 발걸음을 향하던 때, 사진가 브랏사이의 마법 같았던 ‘밤의 파리’에 매료되어 밤의 불빛을 찾아 바삐 셔터를 눌러대던 열정만큼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던 청춘의 시절이었다. 1992년부터 근 3년간 작가의 두 눈은 광주의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지만 밤의 불빛 사이를 삐집고 드러낸 장면들엔 그 때의 사진에 대한 열망과 소박한 삶의 정경들이 찬연하고도 고요하게 저장되었다. 현란하지도, 정돈되지도 않았고 멋진 기교도 없었지만, 그 순간 가장 순수했던 열정의 시선은 그 시간이 품은 공기를 통째로 들이켰다. 25년 즈음이 지나 다시 들춰낸 사진들엔 그 시간의 온기가 그대로 담겨있다. 다시 꺼낸 사진들에 묘한 설레임이 다가온다는 작가의 말처럼 순수의 시간을 저장한 장면들은 지난 시간의 기억들은 자연스레 소환한다. 사라졌지만 남겨진 삶의 안온한 순간들은 사진에 저장되었고, 다시 사진은 우리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사진들을 보며 시간을 거슬러 무언가를 간절히 열망하던 마음과, 느릿하고도 여유로웠던 시간들을 되새겨볼 수 있기를 바란다. 전시를 위해 다시 오래전 필름을 꺼내주신 박일구 작가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8.10. 예술공간 집 문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