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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ase

강규건, 김소정, 이 헌, 지문규
2021. 6.17 ~ 6.30

동시대 청년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예술공간집 후원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erase>展으로, 강규건, 김소정, 이 헌, 지문규 작가가 참여했다. 주로 서울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성균관대 대학원에 함께 재학중이다. 이들은 지난해부터 현재까지 개인적인 맥락, 혹은 사회적인 사건이나 미술사적인 문맥 안에서 작가 본인 스스로의 위치를 재정비하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된 언어들을 <erase>라는 공통된 주제로 모았다.
‘지우다’라는 주제는 손 글씨나 흔적을 지우고, 천 따위로 보이지 않게 가려 없앤다는 뜻과 함께 생각이나 기억, 감정들을 의식적으로 없애거나 잊어버린다는 다양한 함의를 담은 단어이다. 네 작가들은 회화적 표현의 양식으로, 또 작품에 내재된 정서를 발현하는 수단으로 ‘erase’를 해석하며 작품으로 연결하였다.

강규건 작가는 신종 바이러스의 여파가 우리의 평범했던 일상을 없애고 지워나가는 데 주목했다. 사회의 활기가 끝을 알 수 없는 속도로 지워짐을 인식한 것이다. 자신의 pc를 정리하며 우연히 보게 된 지난 시간의 사진들 속 즐거운 일상의 모습들이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왔고, 불과 몇 년 전 시간이지만, 모두의 행복했던 일상이 지워지는 듯했다. 당시를 재현하듯 그려낸 그림들엔 과거의 활기찼던 흔적이 지워진 적막한 풍경이 그대로 드러난다.
김소정 작가는 도심 속 한 구석 미처 지워지지 못한 사회의 잔존물들에 주목했다. 허름한 골목길 옆 쌓아 올려진 일상의 잔존물들은 말끔히 사라지지 못하고 적막한 도시의 공기 사이에 고요한 소란을 만들어낸다.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묘사된 어둠 속 부유하는 더미들은 우리 사회의 민낯이자 우리들의 일상일는지도 모른다. 생기를 잃어버린 것들에게 시선을 부여하며 본능적이고 솔직한 인간의 모습에 다가가고자 했다.
지문규 작가의 작품은 어느 날 문득 바라본 가로수 나무 한그루가 눈에 밟혔던 순간에서 비롯되었다. 수도 없이 봐왔지만 유독 자신의 시선에 오래 머무른 나무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유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비집고 솟아난 인공적인 모습에서 느낀 이질적 감정이었다. 평범한 가로수는 더이상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까만 화면을 지워나가며 그려진 나무들은 독특한 풍경으로 시선을 붙들어 놓는다. 역설적으로 작품에 사용된 ‘먹’도 완전한 자연의 소재가 아닌 인공적 ‘먹’으로 일상 속 당연하지 않은 상황들을 들춰낸다.
이 헌 작가는 스스로가 가진 기존의 생각, 형태, 관습들을 의심하고 재점검하며 미술에 관한 형식과 사상, 습관 및 태도들을 제거해보고자 일련의 지우기를 행했다. 미술사 속 명작들을 과감하게 해체하고 지워냈다. 색, 형태, 이미지들을 검증했고, 그 결과물로 지워버리기를 위한 <흑색회화>를 그려냈다. 어둠의 진공상태가 되었지만, 어둠 속에 머물며 새롭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예측할 수 없는 잠재적 상태를 암시한다.
지운다는 의미는 결국 또 다른 생성을 의미한다. 네 명의 청년작가들은 자신이 포착한 시선의 안에서 무언가를 지우며 다시 생각하게 하고 물음을 던진다. 그렇기에 그들의 지우기는 우리 사회에 던지는 소중한 메시지로 읽혀진다.

이 헌 작가는 전시글에서 “이번 전시< erase >는 참여 작가들의 개인적 사유가 회화적 공정을 거쳐 작품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실패했거나 성취되었던 지점들을 나열하고 있다. ‘지우거나 없애는’과정 속에 생겨난 어설픈 자국들이 회화의 영역 안에서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식되듯이, 이번 전시에서 우리가 보여주고자 하는 작품들과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 사이에 존재하는 ‘어설픈 흔적’마저 새로운 가능성으로 발견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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